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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기

외국어로 고백하기/ 최영미

by 6ㅤ 2020. 3. 23.

로마로 가는 열차에서, 그에게 나를 보여주었다.
보르도의 카페에서, 그녀에게 나를 읽어주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구두가 참 이쁘네요.
커피 아니면 홍차?
이탈리아를 좋아하세요?
서울의 여름도 보르도처럼 더워요?

사교의 예식을 생략하고, 우리는 상대에게 자신을 던졌다. 서로의 심장을 만지고, 썩은 창자를 뒤집어 보였다. 뒤엉킨 생각과 감정의 실핏줄 들을 몇 마디로 정리해서 서로에게 안겼다. 식탁 위의 오믈렛이 식기 전에 나는 그녀의 어제와 오늘을 마법을 구슬로 들여다보듯 명쾌하게 포크로 찍어 떠올렸다.

외국어로 고백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철수와 순이에게 감추었던 복잡한 자화상을 리처드와 퍼트리샤에게 그려주며, 마음을 내려놓았다. 보르도에서 만난 푸른 눈동자 속으로 들어가 나는 편안하게 다리를 뻗었다. 고해 뒤의 지저분한 뒤끝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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