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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 안미옥 두 손은 먼곳에 있다.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너는 처음부터 모른다고 했다. 슬픔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슬픔이 숲에 가득 찬다. 숲을 보고 있다. 거대한 바위를 보고 있다. 바위 속에 있는 바위를. 바위 속에 있는 슬픔을. 씨앗을 꺼내려면 열매를 부숴야 한다. 웅크리고 앉아서 뭐 하고 있어? 그냥 혼자 있어요. 우리가 자주 하던 말 우리가 자주 듣던 말 너의 눈빛은 돌 같아. 바위 같아. 그 안이 다 보인다. 집 안에서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흠뻑 젖은 내가 너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자라서 시체가 될까 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열차는 제시간에 맞춰 출발한다. 열차가 지나가면 우리도 지나갈 수 있겠지 각자의 목적지로, 반대 방향으로. 2020. 12. 6.
돌의 정원/ 안희연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나를 열고 여긴 더 이상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소매를 끌며 자꾸만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우리는 한 울타리를 넘어 처음 보는 숲으로 갑니다 보통의 숲이었는데 나무들이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올려다보면 아주 긴 목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흰 종이 위를 맨발로 걸어가 본 적 있니 앞이 안 보이고 축축한 버섯들이 자랄 거야 거기 있어? 물으면 거기 없는 여름 우리는 아름답게 눈이 멀고 그제야 숲은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서 눈부신 정원을 꺼내주었던 것입니다 색색의 꽃들 아름다워 손대면 검게 굳어버리는 곳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멀찌감치 익숙한 뒷모습을 가진 이가 보였습니다 아니 거기서 무얼 하고 계세요 왜 그런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무심코 둘러보.. 2020. 12. 6.
다른 곳/ 채호기 나는 내 안으로 나 있는 돌계단을 내려갔다. 심장 소리가 거세게 고막을 두드렸다. 그곳은 언젠가 와본 것 같은 계곡이었다. 평범하고 흔해서 기시감을 주는 그곳에 나는 오래도록 서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공기에 흩어진 채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숨을 들이마실 때 코를 통해 내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내가 되었다. 내 발은 돌을 밟고 있다. 돌의 요철에 따라 종아리 근육이 긴장하고 있다. 나는 비스듬히 짝다리 짚고 흰 나무에 기댄다. 은사시? 자작? 나무 이름을 잠시 생각해본다. 잎이 잔털 보숭한 뒷면을 보이며 말한다. 듣지 못하는 나는, 바람이 부는구나, 생각한다. 나는, 한 그루 나무라면 좋겠다, 생각하며 나무 우듬지를 바라본다. 거기 바다 같은 하늘이 있다. 양쪽 산이 가파르게 솟은 계곡이라 여기는 바다 속.. 2020. 12. 6.
실존하는 기쁨/ 황인찬 그는 자꾸 내 연인처럼 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와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아파트 단지의 밤 가정의 빛들이 켜지고 그것이 물가에 비치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검게 타들어 가는데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기 말한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또 보자고 한다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2020. 12. 4.
두려움 없는 사랑/ 김현 약속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손을 놓고 마음을 정리한 후에 이불을 덮어주고 기다리는 것으로 인생은 정리되기도 합니다 어제였던가요? 당신이 꿈나라에서 데리고 온 작은 개를 언덕도 없고 레몬나무도 없는 배 위에 올리고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바다가 너무 넓어 건널 수가 없어요 배를 주세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배를 둘이 노 저어 갈게요 내 사랑과 내가 작은 개가 뭘 안다고 컹컹 짖고 나는 물러나서 당신 맨발에 코를 문지르다가 어제였던가요? 박근혜 대통령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든다고 했어 말해주자 당신이 여느 때보다 더 크게 웃다가 그만 오줌을 쌌지요 그렇게 다시 당신이 뜨거운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요 바다에 간 적도 있잖아 뽀송뽀송한 새 바지를 입고서 광어회를 먹으며 불꽃놀.. 2020. 11. 28.
우리/ 오은 괄호를 열고 비밀을 적고 괄호를 닫고 비밀은 잠재적으로 봉인되었다 정작 우리는 괄호 밖에 서 있었다 비밀스럽지만 비밀하지는 않은 들키기는 싫지만 인정은 받고 싶은 괄호는 안을 껴안고 괄호는 바깥에 등을 돌리고 어떻게든 맞붙어 원이 되려고 하고 괄호 안에 있는 것들은 숨이 턱턱 막히고 괄호 밖 그림자는 서성이다가 꿈틀대다가 출렁대다가 꾸역꾸역 괄호 안으로 스며들고 우리는 스스로 비밀이 되었지만 서로를 숨겨주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2020. 8. 21.
여름잠/ 안미옥 ㅤ아주 열린 문. 도무지 닫히지 않는 문. ㅤ나는 자꾸 녹이 슬고 뒤틀려 맞추려 해도 맞춰지지 않았던 내 방 문틀을 생각하게 돼. 아무리 닫아도 안이 훤히 보이는 방. 작은 조각의 침묵도 허락되지 않던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주 사적인 시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아서. ㅤ네 문을 닫아보려고 했어. 가까이 가면 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비틀어진 틈으로 얼굴을 밀어 넣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되었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가진 것은 모두 문밖에 나와 있었고, 나는 그게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않으려 했다. ㅤ춥고 서러울 때. 꿀병에 담긴 벌집 조각을 입안에 넣었을 때. 달콤하고 따듯했어. 꿀이 다 녹고 벌집도 녹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 2020. 8. 21.
그해 봄에/ 박준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2020. 8. 21.
캔들/ 안미옥 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징그럽고 다정한 인사 희고 희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2020. 7. 16.
나의 다른 이름들/ 조용미 페르난두 페소아는 알베르투 카에이로이자 리카르두 레이스이고, 알바루 데 캄푸스이다 그의 이름은 수십 개, 이들은 이명동인이지만 또한 이명이인이고자 한다 나는 어디까지 나일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나임을 증명할 수 있으며 어느 순간 나의 다른 얼굴을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가 나는 내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으로 똘똘 뭉친 이 진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한순간 전의 내가 한순간 후의 내가 아님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내가 내가 아님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일은 무척이나 고독한 일 나의 삶을 살다가 또 다른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치밀한 환상이 필요한 일 내가 죽기 전에 다른 나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일은 정교한 시간 배치가 필요한 일 나는 왜 시종일관 오로지 나 자신이어야만 하나 오늘도 내 속에.. 2020. 5. 23.
아주 추운 곳에 가서야만 쉴 수 있는 사람/ 김사월 아무것도 명쾌하지 않고 모든 것이 명쾌하다 눈보라에 날리는 마을과 아직도 초록인 이파리 넓게 펼쳐진 밭과 높은 나무들 회색이 섞인 하늘색 구름과 구름에 묻은 햇살의 부드러움 강한 눈 모든 것이 명쾌하지 않다 내 몸에 담긴 정신과 이 곳에서 뭔가를 얻고 싶었던 알량한 욕망과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나 자신과 어디를 보아도 머리 속으로 도시를 보고 있는 나의 눈알 해는 생각보다 일찍 질 것이다 나는 겨우 하루를 보냈다 마음 속의 사랑 쓸모없어진다면 폐기될 생명 이유가 없는 방황 가속도가 붙은 방황 너무나 고요한 방황 이곳은 사실 바람으로 이루어진 곳인 걸 나만 모르고 있었다 왜 태어났을까 나는 어디까지 살면 될까 나는 가치를 어디에도 두지 않는 것이 좋았다 인터폰에 비치던 여자 아이의 모습 여자 아이는 굳고 .. 2020. 5. 19.
적산가옥/ 신미나 나를 만난 것이 나쁜 꿈이었던 듯 살길 바라요 손바닥을 펼치면 마음에 이리도 많은 적이 기를 세웠으니 신발을 세워 물기를 빼던 댓돌은 사라지고 향만 취하고 술은 뱉듯이 저는 여태 빌려온 사랑 주인 없는 이별만 하였습니다 이제 알 것 같아요 태양이 실눈을 뜨면 금을 쪼갠 듯 빛이 새요 구름이 해와 합해질 때 처음으로 당신 속을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 한정현의 를 읽는 중이다. 2020. 5. 6.
우리가 가난한 연인이었을 때/ 이근화 시커멓게 볶은 오뎅과 쭈글쭈글 조려진 꽈리고추로 밥을 먹었다 숟가락 젓가락 하나씩 나눠 들고 못생긴 감자를 파먹었다 우리가 가난한 연인이었을 때 푸른곰팡이 붉은곰팡이도 꽃이었다. 아무 데서나 마음이 꺾였고 은화를 줍듯 공들여 걸었다 긴 겨울밤을 자전거로 달렸다 쉭쉭 황소 같은 숨을 멈추고 얼음장을 들어 올렸다 두 손을 어찌할 줄 몰랐다 우리는 계속 가난한 연인이었고 돌아가는 바퀴가 우습고 질겼으며 출몰하는 다람쥐가 모두 새끼였다 가여웠다 쓰라렸다 우리가 가난한 연인으로서 별을 서로 만나게 했을 때 보라색 구름을 이어 붙일 때 골목길에서 딱딱한 어둠을 차버렸을 때 2020. 5. 1.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 위에 누워있었다. 그는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 속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 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2020. 4. 18.
울고 있는 사람/ 이제니 우울을 꽃다발처럼 엮어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땅만 보고 걷는 사람입니다. 왜 그늘로 그늘로만 다니느냐고 묻지 않았다. 꽃이 가득한 정원 한편에서 울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성마른 말이 너를 슬프게 하는구나. 누군가의 섣부른 생각이 너를 슬프게 하는구나. 갇혔다고 닫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 밖으로 밖으로 나가세요. 산으로 들으로. 강으로 바다로. 너를 품어주는 것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세요. 그렇게 걷고 걷고 걷다 다시 본래의 깊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세요. 그러나 너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구나. 갈 곳이 없어 갈 곳이 없는 사람인 채로. 구석진 곳을 찾아 혼자서 울고 있구나.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구나. 2020. 4. 7.
마르고 파란/ 김이강 아무튼 간에 너의 목소리가 나직나직하게 귀에 걸려 있다 우동 먹다 말았어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고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이라니, 이런 묘사는 너무 외로워 처음엔 모든 게 크고 멋진 일이지만 나중엔 그런 것들도 그저 무심하게 흘러가는 거라고 쓸쓸히 말하던 사람이 있었지 그러니, 부디 잘 살아달라고 당부하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을 묘사하는 너에게 그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헤어진 애인처럼 전활 받지 않는 너에게 우리 사이에 남겨진 말들이 지나치게 문학적이라고 생각해 쓰지 않는 그것들을 살아가는 것으로 대신할 줄 아는 너를, 너를 당장에 찾아가려 했어 그렇지만 잠깐 멈춰서 조금 마음을 가다듬고 달려가고 있다, 너에게 자동차도 고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러던 마르고 파란 셔츠를 입은.. 2020. 4. 2.
12월주의자들/ 김이강 사실 나는 좀더 버릇없이 살고 싶어요 지금보다도 더 예의 없이 살고 싶어요 포도를 씻으면서 계속 생각한 거예요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하죠 지금보다 훨씬 더 예의를 차리곤 하죠 그건 내 콤플렉스예요 컴플렉스라고 분명히 썼는데 콤플렉스로 바뀌는 한글 파일의 콤플렉스처럼 말이에요 오늘 이 글은 손으로 썼지만 옮기면서는 다른 글이 되어버리고 마는 콤플렉스예요 음악가가 되려고 했어요 한번쯤 그럴 수도 있잖아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처럼 내가 아무것도 아닌 적이 있을까요 당신의 음악을 사랑해요 아무것도 아닌 때에도 음악은 음악이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후에도 아무런 연관성 없이 콤플렉스처럼 일어났어요 이런 건 다 콤플렉스예요 노트에는 컴플렉스라고 썼는데 여기서는 콤플렉스라고 쓰.. 2020. 3. 28.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2020. 3. 26.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문정희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메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 2020. 3. 23.
연두가 되는 고통/ 김소연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 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멍,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벌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나뭇잎 .. 2020. 3. 23.